시는 가행(歌行)에뛰어나 「채미가(採薇歌)」·「학산구조(鶴山九操)」와 같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서(書)는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이경석(李景奭)·정온(鄭蘊) 등 당대 명유에게 준 것이 많다.
잡저는 「성설(性說)」·「심설(心說)」·「심성정지의변(心性情志意辨)」·「용학도후지(庸學圖後識)」·「인의예지설(仁義禮智說)」·「무극이태극설(無極而太極說)」·「음양설(陰陽說)」·「정의변(情意辨)」·「지의변(志意辨)」 등의성리학에 대한 것과, 「가계오조(家系五條)」·「채미헌기(採薇軒記)」 등이 실려 있다.
잠과 명 역시 「존양잠(存養箴)」·「성찰잠(省察箴)」·「동벽명(東壁銘)」·「서벽명(西壁銘)」에서 보듯 심성수양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창의록」은 병자호란 때의 의병활동을 기록한 것으로 이 방면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신적도(申適道)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관료이자의병.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호계(虎溪). 아주 신씨의성읍 파조(派祖) 신광부(申光富)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신원록(申元祿)이고, 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동생은 신달도, 신열도이다.
신적도(申適道)[1574~1663]는 청년기에 한강정구와 여헌장현광에게 배웠다. 학문과 효행이 뛰어 났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급제하였다.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이피난길에 나서고 국사가 어지러운데 신하된 사람으로 산하에 묻혀 구차하게 생활을 도모할 때가아니다.”하며 원근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밤낮 달려가니 이미 화의를 맺어 적이 물러간 뒤라 어전에 소장을 올려 장한 일이란 비답(批答)을 받고 나라로부터 상운도 찰방(祥雲道 察訪) 벼슬이 내렸다.
병자호란 때에도 의성 의병장으로활약하였다.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으며, 이를 배척한다는뜻에서 “척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 어찌 강화파들은 반대한단 말인가?오랑캐가 겁나 두려워함이라. 망국꼴 보려는 왕손매의 심정이구나.” 라는 척화시(斥和詩) 읊었고, 군사와 양곡을 나라에 바쳤다. 나라에서 건원릉 참봉(健元陵 參奉)의 벼슬이 내려졌다. 임금의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기 위해 서울에 가서 사은(謝恩)의예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의 학소대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날마다 『춘추(春秋)』를 읽으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소주(韶州) 산곡에 대명(大明)의일월이 비친다고 했다.